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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우문현답
수능 국어의 문학 개념어가 가진 오해를 풀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길게 할 얘기는 아니니 말로 풀어보겠다.
C-1. 반드시 지문 순서대로 선지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①번 선지가 대구법이고 ②번 선지가 연쇄법이라고 했을 때, 작품에서 대구법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 연쇄법이 나오리라는 법은 없다.
물론 실제로 비슷하게 나온 적이 한 번은 있다. 하지만 정말 그 한 번이 전부다. 아래 예시가 바로 그것이다.
배 방에 누워 있어 내 신세를 생각하니
가뜩이 심란한데 대풍(大風)이 일어나서
태산(泰山) 같은 성난 물결 천지에 자욱하니
-> ② 거대한 자연물에 비유하여 악화된 기상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크나큰 만곡주가 나뭇잎 불리이듯
-> ③ 식물의 연약한 속성을 활용하여 화자의 위태로운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하늘에 올랐다가 지함(地陷)에 내려지니
-> ④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를 대비하여 목전에 닥친 위기감을 강조하고 있다
열두 발 쌍돛대는 차아*처럼 굽어 있고
쉰두 폭 초석(草席) 돛은 반달처럼 배불렀네
굵은 우레 잔 벼락은 등[背] 아래서 진동하고
성난 고래 동(動)한 용(龍)은 물속에서 희롱하니
방 속의 요강 타구(唾具) 자빠지고 엎어지며
상하좌우 배 방 널은 잎잎이 우는구나
이윽고 해 돋거늘 장관(壯觀)을 하여 보세
일어나 배 문 열고 문설주 잡고 서서
사면(四面)을 돌아보니 어와 장할시고
인생 천지간에 이런 구경 또 있을까
구만리 우주 속에 큰 물결뿐이로다
이렇듯 작품의 내용 순서대로 선지가 작성된 경우도 존재는 하지만, 이 경우는 예외라는 거다.
많지 않으니 아예 이런 경우를 생각조차 안 하는 게 바람직하다.
C-2. 분위기는 애매한 개념이기 때문에 명확하게 제시된다.
현대시를 대입에 내는 나라는 남한과 북한뿐이다. 사실 현대시 자체가 그만큼 객관성을 담보하기 힘들다는 거다. 하지만 수능은 5천만 국민을 납득시켜야 하는 시험이며, 우리나라만큼 전국민이 대입에 관심을 갖는 나라도 없다. 수험생의 교통 편의를 위해 출근을 늦게 하며, 기자들은 물론 각종 전공자가 달라붙어 수능에 시비를 걸곤 한다. 그래서 평가원도 현대시가 가진 ‘모호함’을 상당히 두려워한다. 그 모호함을 가장 많이 띠는 주제는 바로 ‘시적 분위기’이다. 결국 평가원은 분위기를 결코 모호하게 낼 수 없다. 다음 문제를 보자.
선뜻! 뜨인 눈에 하나 차는 영창
달이 이제 밀물처럼 밀려오다.
미욱한 잠과 베개를 벗어나
부르는 이 없이 불려 나가다.
한밤에 ㉡홀로 보는 나의 마당은
호수같이 둥긋이 차고 넘치노나.
쪼그리고 앉은 한옆에 흰 돌도
이마가 유달리 함초롬 고와라.
연연턴 녹음, 수묵색으로 짙은데
한창때 곤한 잠인 양 숨소리 설키도다.
비둘기는 무엇이 궁거워* 구구 우느뇨,
오동나무 꽃이야 못 견디게 향그럽다.
- 정지용, 「달」 -
Q. ㉡은 화자를 둘러싼 고즈넉한 분위기를 드러낸다.(O.X)
‘고즈넉한 분위기’는 고요하고 넉넉한 분위기라는 뜻이다. ‘홀로 보기’에 고요하고, ‘나의 마당’은 ‘차고 넘치’기에 누가 봐도 넉넉하다는 것이다.
평가원은 이처럼 ‘분위기’같이 명확하지 않은 개념일수록 명확하게 출제한다.
C-3. 애매한 개념은 그냥 치환해서 생각하자.
[1] 환기 = 불러일으키다
환기라는 말은 흔히 우리가 ‘공기를 바꿈’의 의미로 쓰는데, 문학에서는 환기라는 어휘를 그런 의미보다 조금 넓게 쓴다. 특정한 분위기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참고로 ‘공기를 바꾸다’의 환기와는 한자 자체가 다르다.
[2] 내적 갈등 = 괴로움
내적 갈등이라는 말은 흔히 우리에게 ‘고민’이라는 정도로 치부된다. 그렇지만 ‘내적 갈등’은 문학적으로 엄연히 ‘괴로움’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고민은 괴로움의 일부일 뿐이다. 참고로 외적 갈등이라는 말은 평가원에 잘 나오지 않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싸움)이 바로 외적 갈등이다.
[3] 인식 = 생각, 사고
인식한다는 말 자체가 상당히 현학적이다. ‘화자의 인식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라는 식으로 쓰이는데, 인식이라는 말이 좀 어려워서 그렇지 사실은 ‘화자의 생각이 변하고 있다’는 말과 정확히 같다. 그래서 인식이라는 말이 어려우면 말을 생각으로 바꿔서 읽어보자.
[4] 공감각 = 감각의 전이
공감각은 단순히 감각이 두 개가 나온 게 절대 아니다. 가령 따뜻한 커피를 마셨을 때, 따뜻하고 쓴 맛이 난다고 해서 절대 공감각이 아니라는 거다. 감각이 ‘전이’돼야 공감각이다. ‘푸른 종소리’에서, 원래 종소리는 청각적인 것이지만 이것에 시각적 심상인 푸름을 대입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특정한 감각이 다른 감각으로 ‘전이’돼야 공감각이라는 요건이 충족된다.
[5] 명시적 = 분명히
명시적이라는 말 역시 상당히 현학적이다. 사실 ‘분명히’라는 말하고 의미적으로 매우 통하는데, 굳이 쓸 이유가 없는 표현이다. ‘분명히’라는 말로 바꿔서 읽자.
C-3. 고전시가 공부는 기본이다.
아래의 문제를 풀어보고 이야기하는 게 더 좋겠다. 일단 지문을 읽고 문제를 풀어보자.
(가)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칠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 남구만 -
(나)
도롱이에 호미 걸고 뿔 굽은 검은 소 몰고
고동풀 뜯기면서 개울물 가 내려갈 제
어디서 품 진* 벗님 함께 가자 하는고 <제2수>
둘러내자* 둘러내자 우거진 고랑 둘러내자
바랭이 여뀌 풀을 고랑마다 둘러내자
쉬 짙은 긴 사래는 마주 잡아 둘러내자 <제3수>
땀은 듣는 대로 듣고 볕은 쬘 대로 쬔다
청풍에 옷깃 열고 긴 휘파람 흘리 불 제
어디서 길 가는 손님네 아는 듯이 머무는고 <제4수>
- 위백규, 「농가(農歌)」 -
(다)
사월이라 초여름 되니 입하 소만 절기로다
비 온 끝에 볕이 나니 날씨도 화창하다
떡갈잎 퍼질 때에 뻐꾹새 자주 울고
보리 이삭 패어 나니 꾀꼬리 노래한다
농사도 한창이요 누에치기 한창이라
남녀노소 몰두하니 집에 있을 틈이 없어
적막한 사립문을 녹음(綠陰) 속에 닫았도다
목화를 많이 가꾸소 길쌈의 근본이라
수수 동부 녹두 참깨 부룩*을 적게 하소
갈 꺾어 거름할 제 풀 베어 섞어 하소
물 댄 논을 써레질하고 이른모를 내어 보세
- 정학유,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
* 품 진: 품앗이를 한.
* 둘러내자: 휘감아서 걷어 내자.
* 부룩: 곡식이나 채소를 심은 사이사이에 다른 농작물을 심는 일.
Q. (가), (나), (다)에는 모두 청각적 심상이 나타나 있다. (O.X)
이 문제를 풀 때 ‘지식’이 부족해서 고민했다면, 아직 고전시가에 대한 공부가 한참 부족한 거다.
답은 O인데, (나)와 (다)의 근거는 쉽다. 각각 ‘휘파람’ ‘노래한다’가 근거이다. 아마 이 문제를 틀린 사람들은 (가)의 근거를 못 찾아서 망설였을 것이다. ‘우지진다’는 고전 어휘는 ‘울며 지저귄다’는 뜻이다. 이 어휘를 몰라서 이 문제를 틀렸다면, 정말 고전시가에 대한 기본적인 어휘조차 외우지 않은 것이다. 평가원의 문학 개념어는 ‘어휘’에도 크게 의존한다. 따라서 문학 개념어를 공부함에 있어, 고전시가 어휘는 당연히 선행학습되어야 하는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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